화창한 2014년의 5월..이 날은 내가 스페인어를 공식적으로(=학원을 다니며) 공부하기 시작한 지 딱 1년째 되는 달이었다. 

2013년 5월의 내 상황은, 그 때 당시 나에게 PT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교생실습을 가는 바람에 매 주 화/목 9시가 딱! 비게 되었고

그 때 운명처럼 회사 근처에 있던 종로의 F 스페인어 전문 학원의 초급반도 화/목 9시에 시작이었다. 


그래, 기왕에 뭔가를 배우는 데 쓰던 시간이었으니까. 약간 이르기는 하지만(나는 8년뒤에 있을 10년차 휴가에 스페인어권을 여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지금 배워서 8년뒤에 기억이 날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녁에 할 일도 없는데 새로운 거나 배워보자! 하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시작을 했다. 


학원 커리큘럽을 중도 이탈없이 쭈욱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내 책상 서랍에는 Nivel 1, 2, 3, 4, 5, 6 의 알록달록 책과 고급편 책까지 전부 다 꽂혀 있었다. 

물론 문법 중심으로 수업을 들어서, 작문과 말하기는 시망이었지만, 그래도 A1라면 왠지 모르겠지만 해볼 만 할 것 같다는 근자감으로

아주 약간의 망설임 끝에 2014년 DELE A1 5월 시험을 덜컹 신청 해 부렀다. 


DELE 는 스페인어학원에서 주최하는 전세계 공통적인 스페인어 능력시험으로, 

총 6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A1는 A1, A2 / B1, B2 / C1, C2 로 나뉜 단계 중 최하위….레벨이다. 

기초적인 스페인어 활용 정도를 시험하는 내용이며, 무려 문법이 현재!!!만 시험범위에 들어간다는 점이 최대 장점이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보 DELE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인데…


시험 준비를 한다며 2달 동안(14년 4월, 5월) F학원에서 시험 대비를 하고, 

나름 자신은 없지만 6개 정도 되는 모의고사 문제를 풀고, 1,000자 가량의 단어를 외운 상태로 시험장에 들어갔다. 

자, 합격률 95%의 시험이라는데 내가 설마 5%에 들겠어? 5%에 들어서 내 피같은 시험 접수비 15만원을 스페인 재정을 위해 쓰는 일이 있겠어? 하면서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 시험 당일 경희대학교. 보통 1,000명 정도가 시험을 본다고 한다. A1는 70명 가량


1. 시험장에서부터 스페인어가 들릴꺼에요

토익시험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핸드폰도 꺼야 하고, 가방도 앞에 놔야겠지?

그런데 DELE는 여기서 한 술 더 뜬다. 시험보는 교실 입구에 들어가면 입구에 가방을 전부 놓고, 맨몸으로 책상에 앉아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요점정리해 놓은 노트나 내 귀여운 강아지모양 필통도 들고 갈 수 없다는 얘기다. 

자리에 앉으면 미리 출력해 놓은 수험자 정보와 연습장, 4B연필(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연필깎이(왜), 지우개가 있다. 

수헙자 정보지에는 내 정보가 프린트 되어 있는데, 거기에 맞추어 똑같이 내 정보를 작성한 다음 제출한다. 


우리 교실에 수험생은 약 70명 가량이었고, 감독관은 3명의 스페인사람과 1명의 스페인어 가능한 한국인이었다. 

희안한 점은 시험 안내를 하는데, 스페인어로 안내를 해준다는 점9시 10분부터 시작합니다, 중간에 화장실에 갈 수 없습니다..등등의 사항을 스페인어로 얘기 해 준다. 왜죠..


이 시험이 한국에서 치뤄지기는 하지만, 외국인들도 많이 보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설명을 해 주는 걸까

아니면 이 정도 말도 알아먹지 못하는 멍충이는 여기 앉아서 시간낭비하지 말고 집에 가서 비빔면이나 비벼 먹으라는 걸까.


# 아 그래서 복도에서부터 스페인어로 지시하는 문장이 있었던 거구나, 그랬구나.


2. 듣기시험이 시작하고 게임은 끝이 났어요.

독해, 듣기, 작문 순서대로 각각 10분씩의 쉬는 시간을 두고 시험이 시작된다. 

원래는 각 시간에 해당하는 과목만 봐야 하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부족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은 문제되지 않았다. 

문제는 듣기 시험인데…


엄청났다!


Tarea 1부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을 하면서, 보기에 있는 모든 단어들을 얘기했다. 

내가 공부한 대로라면, 보기에 1, 2, 3, 4번이 나오면 보통 답에 해당하는 것만 얘기해서 단어를 듣고 때려맞추기 신공이 가능했었는데

실제 시험에서는 1, 4 단어가 같이 나와서 이 중에 뭘 골라야 하는거지? 하는 카오스 상태 돌임…

중간에 나왔던 문제 중에 '여자의 어머니의 직업을 고르시오'하는 문제에는 별 씨잘데기 없이 남자가 자기 엄마, 아빠 직업까지 자랑을 해 버리는 바람에 당췌 여자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나는 또 누구인가 하는 혼동의 도가니…


Tarea1가 이래 버리니 내 머릿속에는 망했다는 생각이 가득차서 그 뒤의 문제들은 들리지도 않았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선지 문제들이 이런식으로 함정을 파놨던든..그리고 난 그 속에 같이 한마리 희생양 ㅠ


작문시간에는 원래 줬던 연필을 가져가고 내사랑 모나미 볼펜을 준다. 

첨부터 있었던 연습용 종이는 이때 모나미 똥닦을 때나, 작문 문장 연습을 할 때 쓰면 된다. 


3. 회화는..회화는…gracias Alex pero…

보통은 토요일에 독해, 듣기, 작문을 다 보고 그 다음날 회화를 보는 식이다. 

이틀동안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나는 운 좋게 하루에 다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간혹가다가 사무국에서 전화가 와서 시간을 바꾸겠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집이 지방인 사람들은 시험 접수를 할 때 하루에 다 보고 싶다고 언급을 하면 정상참작?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오전 시험이 10시 30분 경에 끝나고, 회화가 15시 45분에 시작하는 관계로 같이 수업 들었던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며 서로 누가 제일 망쳤는지 겨뤘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내가 제일 망했으니까…


회화도 미리 준비를 해서 갔다..당연히..

각 테마별로 소주제에 대한 짧은 스토리는 만들었는데, 3개의 소주제를 1~2분 내로 말하면 되는 거였다. 

내가 뽑은 테마는 vida diaria(일상)이었고, 소주제는 trabajo(일), estudio(공부), tiempo libre(여가시간)이었다. 

바로 시험을 보는게 아니라, 15분 정도 준비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준비 시간에 내가 준비 해 간 문장들을 적으며 열심미 익히려고 노력했다. 

물론 준비실에는 가방을 들고 갈 수 없지만 이정도는 충분히 외웠으니까 문장을 만드는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준비실을 나와서 맞은편에 있는 시험장에 가는 순간 오마이갓.

나름 외국인 내성이 강한 아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스페인어로 서스럼 없이 말을 거는 감독관 앞에서는 작아졌다..

내가 한 최고의 스페인어는 내 이름을 물어본 감독관에게 '그럼 네 이름은 무엇이니?'하고 되물은 거였다..


감독관 Alex는 비루한 내 스페인어를 찡그리지 않고 들어줬고 어설픈 내 질문에 (cuba그림이 나오고 hablar라고 써있는 문제가 나왔을 때는 나도, 너도 모두가 당황했다. 대체 뭐라고 물어봐야 하는거야..)아주 약간의 당황만을 비치고 대답을 해 줬다. 


회화 시험시간이 끝나 갈 수록 내 고개는 계속 숙여졌고, Alex의 파란 눈을 쳐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시험이 다 끝나자 뭐 훔친 사람마냥 시험장을 빠져나왔는데,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망했어 망했어'하는 소리없는 외침이 흘러 나왔다. 


그렇다. 나는 망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시험을 본댔지..그냥 취미로만 스페인어를 할 것을..

그래도 다행인건, 이번에 같이 알게 된 학원 사람들과 스터디라도 하면서 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다는 것…

가끔 게스트하우스도 가서 스페인 친구들한테 껄떡거려봐야지…


성적은 3개월 뒤에 나오고, 성적표는 6개월~1년정도 걸린다는데

나는 이미 Adió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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