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동화집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홍성광역
출판 : 현대문학 201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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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다. - 오스카와일드


누군가의 간접적인 권유로 헤르만 헤서의 [환상동화집]을 읽고 있다. (웹툰 '메지나'작가님이 영감을 얻은 책이라고 하셔서 읽게 되었다)

단편집이라서 호흡이 길지 않고 등장인물도 5명을 넘지 않아 쉽게 읽힐 줄 알았는데 이게 왠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각 편마다의 잔상이 너무 짙고 심지어 꿈에까지 등장한다. 

주인공이 산에서 낙상하는 편을 읽으면 나도 어딘가에 떨어져서 꼼짝 못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덕분에 요즘 꿈자리가 사납다. 


'아우구스투스'편은 어제 읽었는데, 이놈이 또 나한테 잔상을 남겨서 오늘도 계속 생각나게 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 미망인의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그녀의 이웃인 현자는 아이에게 선물로 그녀가 원하는 능력을 주겠다고 한다. 엄마는 오랜 고민 끝에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는'능력을 가지게 해달라고 빈다. 엄마의 바람대로 아이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나 그 때문에 거만하고 오만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청년이 된다. 물론 살면서 두 번의 사랑이 있었지만 그 어떤 유흥, 쾌락, 향락도 그의 허무를 채워 주지는 못한다. 결국 그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놓고 자살하기 위해 포도주에 독약을 타서 마시려고 한다. 그 순간, 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을 준 현자가 나타나 그에게 마지막으로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을 살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를 소망하고 그의 소망은 그 다음날 이뤄진다. 어제까지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비난하고 욕하고 경멸한다. 그는 그렇게 감옥으로 가 노인이 되어 출소한다. 초라해진 그를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만, 그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전에 사랑받을 때는 느낄 수 없던 행복이 그에게 왔다. 그렇게 그는 아주 어린 시절 현자와 함께 지냈던 오두막에서 눈을 감는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지만 엄마가 아이의 소원을 비는 장면은 긴장감이 넘친다. 잘생기게 해 달라고 할까. 건강하게 해 달라고 할까.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할까. 대체 뭘 빌어야 하는거지. 하고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이 바보야. 사랑!사랑이야!사랑을 빌어!'라고 속으로 응원했지만. 결국 그녀가 바란 사랑은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사랑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는 행복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가져도 구멍이 뚤린 자루처럼 가진 것들이 자기 안에 스며들지 못한다. 그냥 소모되는 삶을 계속 살 뿐.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나. 나도 분명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어 사랑을 듬뿍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히!) 그 덕분에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게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사랑받는 사람은 그 사랑을 인지하는 순간 오로지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아예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사랑도 무엇도 아닌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잔상일 뿐이다. 


사랑을 밥이라고 가정하자. 이 밥을 먹기만 하면 밥이 만들어지는 과정, 밥을 만들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들을 알기 어렵다. 그에게는 그냥 식사일 뿐이며 단돈 5,000원에 때울 수 있는 끼니가 된다. 이제 밥을 만든다고 하자. 일단 쌀을 사야겠지. 마트에 간다. 이천쌀 임금님쌀 씻어나온 쌀 중에서 좋은 쌀을 사고 쌀을 씻고 불리고 밥을 앉히고 기다리고 김을 빼고 뚜껑을 연다. 이제 이 사람이 밥을 만드는 법을 몰랐을 때와 같을 수 있을까. 밥을 만들이 위해 들였던 시간과 정성을 알고부터는 누군가가 밥을 만들어 준다는 것의 의미를 다르게 볼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 눈앞에 잘 차려진 사랑을 보면 먹기에 바쁘다. 너무 많다 싶으면 남기기도 하고 한끼 쯤은 안먹어도 살 수 있겠지. 이제 이걸 만들어 먹는다고 하면 어떨까. 


나는 언젠가부터 사랑은 너무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만 보고, 그것을 공부하거나 알거나 귀하게 여기는 법에는 소홀한 것이 아닐까.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에는 분명 다른 능력이 요구된다. 



네가 언젠가 행복했던 순간, 삶이 좋고 가치 있게 여겨졌던 모든 순간을 생각해 보아라. 그때 무엇이 너를 행복하게 했는지 어쩌면 알게 될지도 모르지 않니. 그것을 소원하면 되는 거야. 나를 위해 부디 그렇개 해다오 얘야. - 현자가 아우구스투스에게 마지막 소원을 빌라고 부탁하며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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