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여름이었나, 마트에서 김치를 팔았던 적이 있다. 
남자친구 생일선물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주저 없이 일을 했지.
내가 사귄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다 나를 만나는 동안 생일이 있었는지.
이미 하고 있던 과외와 알바로는 생활비를 메꾸는데도 빠듯했다.

그때 나는 다시는 마트에서 일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초면에 반말로 상스러운 소리를 하는 반장이나
정성껏 쓴 이력서를 네모 반듯하게 찢는 매니저나
고객한테 혼나고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나한테 '언니 이것좀 잠깐 봐줘...'라고 하는 50대 '사모님'이나
하루종일 김치 통을 나르느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님 입에 파김치를 예쁘게 넣어 드려야 하는 고단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여기선 내가 없고 20살 초반 왠 여자애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쓰인다는 느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시키는 일을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하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잠깐 있는 쉬는 시간에는 저마다 담당하는 상품의 이름이 커다랗게 써 있는 옷을 입은 언니들이 딱 두 부류로 나뉘었다.
쉴 새 없이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아무도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화는 없이 소리만 있는 느낌.
뭐랄까 그냥 점점 말라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뭔가가 자꾸 사라지는 기분.
난 분명 사람인데 기계가 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했고 이상했다.

결국 남자친구 생일 선물은 멋진 것으로 사 주었지만 
이후 한달만에 헤어졌고, 마트에서 일한 기억과 같이 이제는 먼 일이 되어 버렸다.

다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초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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