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젊은 혁명가의 이야기를,

시집을 내지 못하고 죽은 젊은 시인의 이야기를 보았다. 


영화 [동주]는 살아있을 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죽어버린 청춘들의 이야기다. 


허여멀건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 소심함, 자기 주장 없는, 키만 큰, 허우대만 멀쩡한. 영화 속 동주는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시인이 아니라 시와 글을 사랑하고 자기 생각을 시로 표현하는걸 좋아했던 앳된 소년이다. 민족시인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는 살아 생전 한번도 항일 운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반일 감정을 담을 시를 썼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2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생각하는 것마저 통제 받던 시절, 말과 행동이 아닌 글로써 자기 생각을 말할 수 밖에 없던 동주에게는 그것 자체가 천형이 아니었을까. 


영화 내내 시종 자기 주장 없이 송몽규를 따라다니는 인상을 주던 동주는 도쿄제대 입시에 떨어지는 바람에 송몽규와 처음으로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된다. '쿄토로 가라, 거기도 살만 할꺼야'라는 몽규의 말에 착한 아이처럼 쿄토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동주는 교련 수업을 거부한 이유로 삭발을 당한다. 그 뒤로 처음으로 동주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학교를 옮기고 몽규와 같이 있기로 결심한다. 다시 만난 몽규는 그 사이 저만치 더 멀어져 있었고, 몽규의 생각과 의지를 동주는 알 길이 없어 그저 맴돌기만 한다.


몽규, 몽규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말과 이름을 뺏긴 세상은 시인이 아닌 사람도 분노하게 할 수 있다. 언제나 친구들 사이에 중심이 되던 몽규, 재능 있고 총명하고 행동력이 있던 몽규는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동주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몽규가 사람들에게서 잊혀진건 당연하다. 그는 다만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만 있었을 뿐이고 어느 것 하나 바꾸지 못하고 아쉽게 죽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알고있는 윤동주,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송몽규.' 라는 식으로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몽규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건 그의 탓이 아니다. 세상 탓이다. 


동주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그냥 다른 수 많은 시인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저 부끄러움이 많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그걸 글로 쓰지 않으면 참을 길이 없던 시인었을 뿐이다. 다만 그가 위대한 것은 부끄러움을 모른체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글로 남겼다는 것이다. 소심하고 멀쑥하기만 한 20대 청년 어디에서 그런 오기와 용기가 나왔는지 모른다. 다만 그는 시인이었을 뿐이고, 시인은 응당 그래야만 한다. 어찌보면 그는 그저 시인으로 살다가 죽었을 뿐이다. 다만 너무 안타깝게. 


참고자료 : https://ko.wikipedia.org/wiki/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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