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세계 영화사 감상문
이번 감상문이 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글을 쓰다가 처음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분량이 미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사람의 분량과 비교하고, 다른사람은 사진을 넣었는데 나도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서 내가 참 내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깨달았다.
평범한 글이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글을 만들기 위해서
아님말고, 가 필요할 때2009/06/08 - [나의/일상] - 실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p.s. 제목으로 쓴 '상처가 꽃이 되는 시간'은 어느 시집의 제목을 차용하였다



소년이라는 말은 가끔씩 우리에게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남자 어린아이들만을 밝히는 변태 성욕 자 들이 있었을 정도로 소년은 그들의 본래 성별인 남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왔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남성 이라기에는 미숙하며, 때에 따라서는 어린 여자아이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들이 본래의 여성성을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는 것에 비하면 소년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는 상당히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만히 놔두어도 스스로 남자가 될 소년들에게 억지로 남성성을 강요한다. 일례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소년은 울지 않는다등의 모두 그들에게 강해질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개한 꽃은 없듯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소년기라는 통과의례를 치러야만 성인남성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수많은 소년 중 한 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축복받지 못한 채 태어났다는 생각을 가진 소년을 어떻게 자라날까. 유머감각이 넘치는 아빠는 사실은 친아버지가 아니고, 항상 신경질을 내는 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선생님에게 처음부터 밉상으로 찍혀버린 바람에 마음 고쳐먹고 제대로 숙제를 하려고 해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냥 학교에 가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을 뿐인데, 일은 점점 더 커지고, 외박, 절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은 여느 불량소년들의 성장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량소년도 소년이기에, 처치 곤란한 타자기를 다시 가져다 놓을 정도로 순진하고 학교를 땡땡이 치는 중에도 놀이기구와 영화를 즐길 정도로 순수하다. 사실 드와넬은 그다지 반항적인 아이가 아니다. 영화 내내 묵묵히 친구와 함께 놀러 다니는 그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 학교가 정한 틀과 맞지 않았을 뿐, 때문에 거짓말도 서툴고 외박도, 숙제를 베끼는 것도 전부 서툴다.

영화의 줄거리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형무소에 가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형무소에 가기 전의 소년시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단짝친구인 르네이다. 내성적인 드와넬과 달리 친구 르네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미래의 한량이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있어도 쉽게 해결책을 찾아내는 그는 부모님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드와넬에게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한다. 르네와 함께 있을 때의 드와넬은 보호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다. 놀이기구를 타고, 영화에 기뻐하며, 어린아이들과 같이 인형극을 보는 장면은 그가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타이프를 훔친 협의로 들어가게 된 형무소는 드와넬에게 새로운 폭력으로 다가온다. 이전까지의 행위는 범법행위라기 보다는 사소한 장난으로 웃어 넘길 수 있었지만, 형무소에 온 뒤로 그는 진짜문제아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또한 형무소는 외부와 단절된 세계로서, 유년시절의 큰 부분을 차지하던 친구, 영화와도 강제로 작별을 고해야만 하는 공간이다. 이처럼 드와넬의 인생에 있어 큰 전환점을 주는 형무소로 가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상당히 로맨틱하다. 눈을 감고 들으면 데이트중인 연인을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콤한 노래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소년의 여정을 위로하는 듯 하다.

소년원에 온 뒤로 드와넬은 도와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판단하여 행동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억울한 일로 뺨을 맞아도, 엄마가 노동센터에 보낸다는 말을 해도 그는 아무 말이 없다. 마치 봄을 기다리는 새싹처럼 상황을 가만히 바라볼 뿐. 소년원에서 드와넬을 자신의 유년시절과 완전한 작별을 한다. 같이 인형극을 보러 가던 어린아이들과도 철창으로 인해 단절되고, 유년시절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친구와도 단절된다. 이 모든 단절의 과정을 눈앞에서 겪으면서 드와넬은 이제 스스로 버텨나가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가장 최초이자,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마지막인 그의 행동은 달리기이다. ‘도망이 아니라 달리기인 이유는, 나에게는 그것이 소년원으로부터의 도망이 아니라 바다로의 접근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드와넬은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바다를 향해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그가 파리를 떠날 때와 같은 배경음악이 흘러나온다. 새로운 세계, 또 다른 성장을 암시하는 음악은 마치 그가 소년원에서 유년시절과 단절되었듯이 이번에도 그의 소년기가 한번 더 도약할 것임을 알려준다.


  이 때에 나오는 음악은 분명히 같은 음악이지만, 카메라를 또렷하게 응시하는 소년의 눈동자를 배경으로 나오는 음악은 이전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배경음악은 영화의 장면을 부가 설명하는 역할을 할 뿐,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옷에 비유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액세서리와 같다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배경음악이 마음에 특히 와 닿는 장면은 다른 장면들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소년이 난생 처음 만난 바다, 떠남을 암시하는 배경음악, 이전까지의 장면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카메라를 응시하는 소년의 표정이 모두 어우러져서 관객 또한 소년의 설렘과 두려움에 동참하게 하는 뛰어난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소년시절을 기억할까? 대부분 그들이 기억하는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청소년기로. , 완전한 남자의 외형과 성격이 갖추어졌을 때로 국한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수염이 나고 목소리가 굵어지기 전에 어린 시절 또한 큰 의미를 가진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하는 과정은 서서히 일어나지만, 어린아이 시절을 잃어버린다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변화는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서서히 행동이 바뀔 뿐인데, 우리는 그런 소년의 행동을 조심스레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다.

트뤼포는 이 영화를 자서전적인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영화로 그려내고 싶었던 감독은 이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온 장 피에르레오를 이후의 4편의 자서전적인 영화에 그대로 기용한다. 배우가 늙어가는 것처럼 감독 또한 늙어갔으니, 과거를 잊지 않고 싶어하던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의 자서전 만들기로는 제격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덕분에 우리는 소년의 상처가 꽃을 피우는 시간을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니,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 좋을 일이 아닐까

 

 

400번의 구타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1959 / 프랑스)
출연 장-삐에르 레오, 클레어 모리에르, 알베르 레미, 가이 드콤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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