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트로스+ 에 쓴 첫번째 글, <열정>이라는 주제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잘 표현했는지를 심사했는데 뜻밖에 13명 안에 들어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창의적인 표현에 점수를 높게 받은 거겠지.
 개인적으로는 평범한 열정을 말하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고 삶을 지속하는 평범한 열정을,
 이렇게 개인적인 글을 포스팅하는건 분명 방문객 증가에 아무 영향 없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식의 포스팅이 많아지도록 할 예정이다. (그렇게 노력할꺼고)
 블로그를 시작한지 1년여가 되는 이 시점에서, 맨 처음 블로그를 만들었던 때의 목적을 되새김질하자.
 나의 생각을 토해내는 공간이라고, 그래서 훗날 돌아봤을 때. 내가 어떻게 살고,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게하는 일기장이 되기를.


죄인. 김아무개는 열정 없이 자신의 삶을 헛되이 보낸 죄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금부터 죄인이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변론을 가지는 시간이 있겠습니다. 죄인, 들어오세요.

 

신이시여.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젊은 나이에 죽은 것도 서러운데 삶을 헛되게 보냈다니요. 제 나이 이제 겨우 29입니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 다닌 지 1년 반도 채 안 되었어요. 얼마나 힘들게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천국에 가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냐는 겁니다!

 

진정하세요. 죄인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 했고, 또 거기서 매우 허무함을 느낀다는 점 잘 압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죄인의 죄를 시시콜콜히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 죄인 스스로가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에요. 자네가 태어나고 나서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인생이라는 자원을 사용했는지 말 해 보세요.

 

그럼 가장 생생하면서도 치열했던 대학교 생활과 사회인이 된 이후의 삶을 얘기해 드리지요. 제가 입사하기까지 과정은 정말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남들 한 번 씩 다 간다는 어학연수도 다녀와야 했고, 짬짬이 인턴도 해야 했고, 공모전도 몇 개 했지요. 정말 학교 다니면서 하루하루가 촘촘했습니다. 수업은 뭐 쉽나요. 이거저거 신경 쓰다 보니 군대 가기 이전에는 좀 놀았을지 몰라도 전역하고 난 뒤에는 연애고 뭐고 다 뒤로 하고 저를 발전시키는 데에만 썼지요. 그렇게 노력하고 나서도 입사하는 게 쉽지 않더군요. 지금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입사원서를 썼는지 짐작도 안 가실 겁니다. 마지막 학기는 거의 지옥이었어요. 남들은 7학기에 합격한 사람도 있는데, 나 혼자 9학기를 다니자니 쪽팔리기도 하고, 취업 스터디를 몇 개씩 해도 뭐 하나 남는 건 없고, 또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격증은 왜 이리 많은지요. 어느 순간에는 내가 어떤 회사를 쓰는지도 모르는 채로 원서접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꺼림칙함도 느꼈지만 그 덕분인지 결국 입사를 하고, 이제는 국민연금도 일 년치 냈겠다, 어느 정도 사회 초년생의 모습을 갖추었네요. 이거 보세요, 지금 제 모습이 대학 생활을 열심히 한 증거랍니다. 그 숱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저는 결국 사회인으로 당당히 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기업에 입사한 것이, 그 동안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증거라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솔직히 판사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판사님이 생각하는 열정이라는 것은 한비야씨나 스티븐 잡스처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가 옳다는 길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마음을 말하는 거겠지요. 하지만 지금 보세요. 이 땅의 평범한 대학생들은 십년이 넘도록 주입식 교육을 받아오고,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전공 선택부터 대외활동까지 전부 대학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이런 판국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라던가. 조금이라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을 만한 취미 생활 등을 하면 바로 바보취급 당해요. 그 시간에 토익 책이라도 좀 더 보라는 거지요.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가 토익 점수나 학점, 인턴경력으로 대치되는 시점에서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열정 이외의 소박한 열정들은 젊은 시절의 객기로 폄하됩니다. 저라고 제 가슴 뛰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까요? 어차피 인정도 받지 못하는데다가, 자기만족을 위한 유희를 즐기기에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게 죄입니까?

 

주변 상황이 자신을 열정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거나, 또는 자신의 열정을 폄하해서 싹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잘라버렸다는 거군요. 그렇다면 그렇게 만든 주범은 누구입니까? 죄인의 말을 들어보니 그 사람을 잡아야겠군요.

 

그건 실체가 없습니다. 모두가 탓하듯이 현재 정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경쟁사회, 높은 교육열, 취업준비생들의 높아진 눈높이. 모두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그런 문제들이 없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해 줄 테니 이번에는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거 참 좋군요. 대체 어딥니까 거기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곳에서 제 삶을 마음껏 살아보고 싶습니다.

 

아마존의 조에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건 좀…….원시지역이라 싫다는 얘기가 아니라, 거기서 대체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주변에는 온통 밀림과 동물들뿐인데요. 뭔가 큰일을 해내려면 큰 곳에서 놀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원시 사회인걸요. 그런 곳 말고 다른 데 없습니까. 기왕이면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로.

 

이번에도 주변 상황을 탓하는군요. 당신이 아까 말 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에게 충실하며 열정적으로 살고 싶은데 사회가, 환경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는다고. 알고 보면 당신도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대학을 다니고 사회에 나오기까지 순간순간 열심히 살았다고. 그게 조에족 일원들이 매일같이 사냥을 하고 살아온 것과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신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같은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 살기 위해서 행위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그걸 열심히 살았다느니, 그 속에서 열정이 있었니. 없었니. 하는 말은 내 귀에는 변명으로밖에 안 들립니다. 경쟁사회라고 하셨지요? 밀림은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어떻게 보면 경쟁사회보다 더 해요. 도태되면 바로 죽으니까 처벌 또한 엄격하지요. 대체 조에족으로 태어나는 게 싫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당신은 아마 열정적인 삶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비야씨같은 삶,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를 찾기 위해 여행해서 책을 쓴 사람들의 모습. 모두 열정적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열정은 그런 게 아닙니다. 구지 세상을 바꾸지 않아도 되고, 자기를 다른 곳에 내던지지 않아도 되요. 내가 말하는 열정이란, 이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의 능력을 알려고 하고, 믿으려고 하고, 또 그것을 만족할 만큼 행했는지를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삶을 줄 때는, 막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스스로를 사랑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요.

삶이 끝난 이 시점에서, 나는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온전히 사용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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