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개의 레포트를 다 포스팅헀다고 생각했는데 남아 있는게 하나 있었다. 까먹기 전에 올려야지
한 학기가 끝나고 나니 그동안 내가 싸질러 놓은 놈들이 꽤나 남아 있어서,
게다가 그 중에 몇몇은 양질의 부산물이기에 어디 날아가버릴까 우려되어 이렇게 포스팅을 합니다. 잔 모로의 아름다운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던 영화. 어쩜 저리 고울까.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한다 해도 그것은 불륜이며 – 그것도 바로 앞에서 딸과 옛 애인과 남편을 버리고 태연하게 도망칠 만큼의 철없고 무모한 – 그녀의 권태 또한 배부른 자의 투정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배부른 사랑놀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항상 남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에게서는 공통점이 없다. 남편에게는 재력이 있고, 라울에게는 정열이 있고, 베르나르에게는 지성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각기 다른 성격이며, 성격이 다른 만큼 지내는 곳 또한 디종, 파리, 몽바르로 각각 다르다. 세 남자의 공통점이라고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밖에 없는데, 이것을 보면 그녀는 그저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자신을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부자연스러운 모습 또 하나는, 그녀가 만나는 남자에 따라 그녀의 외형이나 성격 또한 달라진다는 점이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때에는 정갈한 귀부인의 모습을, 라울과 파리에 함께 있을 때에는 세련되고 소녀 같은 모습을, 베르나르와 함께 있을 때는 코르셋과 머리핀을 벗어버린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 명의 각기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여인은 그저 아름답기만 할 뿐 뚜렷한 개성이 없다. 하얀 도화지는 어떤 물감을 입혀도 그 색이 쉽게 나타나서 원래의 색을 감춘다. 여인 또한 하얀 도화지와 같아서, 그 누구를 만나도 쉽게 공감하고 동화된다. 여인의 이런 속성은 세 명의 남자가 한데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 자리에서 그녀는 모든 색의 집합체인 검은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셋 중의 어느 남자에게 속하는지를 알리길 거부한다.
생각해보면 그날의 파티는 화창한 디종의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현재의 남편과, 애인과, 애인이 될 사람은 서로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또는 앞으로의 일을 모르는 척 검은색으로 자신의 색을 감추었다. 검은색은 흰색과 완전히 반대의 성질을 지녔다. 그 어떤 색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기 때문에 쉽게 동화되는 흰색과는 전혀 다르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쉽게 변하는 흰색 같은 그녀가 그날 검은색 옷을 입었던 것은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다’던 혼잣말을 암시한다. 여러 색이 섞인 흰색의 마지막 모습은 검은색일 테니.
그녀의 권태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 데에 있다. 항상 같은 생활, 같은 장소에서 떠나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에게 새로운 애인은 단지 그녀를 변화시켜주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꼭 라울이, 베르나르가 아니어도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 (이 영화에서 장소는 성격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사람만 나타난다면 그녀는 그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단단하게 묶어 두었던 머리를 풀고 베르나르를 따라 정처 없이 떠날 그녀는 그녀의 권태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사랑을 느낀 다음날 아침에 회의를 느끼는 그녀에게서 베르나르가 마지막 남자일 것이라는 확신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색을 찾아, 다른 사람을 찾아서 계속 떠돌아 다닐 그녀의 권태의 끝은 결국 모든 색을 합쳐 놓은 검은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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