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따뜻한 토요일 오후에 이 영화를 봤다.
극장은 한산했고 둘이서 온 중년의 노부부들이 눈에 띄었다.
임권택과 안성기라는 이름이 이들을 불렀겠지.
연출은 탁월했다.
안성기가 김규리를 연모하기 시작하는데 이유는 없었다.
미인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젊었기 때문인지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눈이 자주 가는 것인데, 남자가 여자를 바라볼 때 묘하게 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생명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을 수 없는 것처럼 감정에게도 왜 태어났냐고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남자는 헌신적으로 병든 아내를 돌보지만
그건 사랑이나 애정이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느낌을 준다.
그저 그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것 뿐이다.
어쩌면 이기적인 마음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세상의 눈도 눈일 테고, 아내의 죽음이 예정된 수순인 이상, 그의 헌신은 죽음 후에 겪을 죄책감을 완벽하게 떨어버릴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가 된다.
아내는 여자 특유의 직감으로 남자의 부정을 의심하지만, 남자의 부정은 와인 한 병 정도의 증거만 남길 뿐이다.
하기사 사모하는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 죄는 아니니까.
그리고 그 여자가 아내와의 정사 속에 등장하는 것도 죄는 아니다.
안성기는 멋있었다.
나이에 비해 배가 나오지도 않았고, 부하직원을 혼낼 때도 감정을 추스를 줄 알며 단어를 고른다.
걸음걸이도 정갈하고 생활도 바르다.
커피 한잔 하자며 권하던 TV광고 속 모습과 똑같은 음성과 표정으로 아내의 음부를 씼고, 아내가 아끼던 강아지를 죽이러 간다.
김규리는 교활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 미를 뽐내는 여자의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하얀 대리석을 가르면서 걸어오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나조차도 눈 한번 깜박거리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남자의 연정을 눈치채고 아내를 떠나보낸 그의 근거지로 쳐들어 올 정도로 무례할 수 있었다.
도망쳐
김규리가 그를 쳐들어 올 때 남자에게 내가 외쳤던 말이다.
도망쳐라
그녀에게 걸리면 안 된다.
당신의 사랑이 그녀에게는 그저 그녀의 자존심을 채우는 양분이 될 뿐일테니.
와인까지 준비한 남자를 보며 미녀는 성공을 예감했겠지만
도망간 남자는 쉬히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것으로 남자는 그 게임에게 영원한 승자가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애달프게 연모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나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지지 못하는 대상이어야 그 마음이 더 숭고하게 느껴질 테니까.
P.S.
칭찬 일색으로 이 영화를 평하고 싶지는 않다.
처음과 후반부에 나오는 장례식 장면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 분명했지만,
외설적인 여자의 모습은 그 표현 방식이 너무나 뻔해서 남자의 사랑을 통속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을 보면 [은교]는 참 잘 만든 영화다.
아직까지 [은교]만큼 가지지 못하는 여자를 향한 남자의 마음을 보여준 영화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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