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2010 3 22 서울에는 엄청난 양의 함박눈이 내리고 있고, 눈을 맞으면서 나는 공항 버스를 타러 걸어 가고 있었다. 새로 등산화를 이렇게 일찍 신게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새로 이중 잠바의 보온성까지 실험하게 되었다. 등에는 60L짜리 뚱뚱한 배낭을 메고, 앞에는 28L짜리 등산용 배낭을 우산도 쓰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지나가던 여중생 무리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할 법도 했지만 때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같다. 무엇보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세계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은행 잔고 증명서라는 말을 들어 적이 있으신지? 하긴 나도 2010 3 22 오후 3 까지는 들어본 없는 단어였다. 정체 불명의 서류는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서류인데, 은행에서 받을 있고, 결정적으로 어느 나라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어떤'나라에서 비자를 받을 때에 필요' 지도' 모르는 서류 중에 하나였다.(결국 사용하지 않았다. 그 어떤 나라도나의 은행 잔고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볼리비아 비자를 받을 때는 필요하다고 하니 한 번 더 알아보시도록) 정체불명의 서류를 받느라 이미 셔터를 닫은 은행의 뒷문으로 헐떡거리며 들어가서 손에 종이 장을 들고 집으로 뛰어갈 때는 이미 내가 공항 버스를 타기로 예상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눈을 펑펑 맞으면서 쪽팔림도 모르고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뛰다시피 걷고 있는 거다. 나는 세계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나는 지금 세계여행을 떠나고 있다는 한마디를 머릿속으로 생각 때마다 가슴이 저절로 펴졌다.

 

사실 이렇게 태평하게 움직여서는 되었는데, 이미 공항에는 나를 배웅하러 친구들이 나와 있었다. 제발 인천공항이 친구들의 주의를 시간 가량 만큼 흥미롭기를.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부모님께 전화 드리랴, 친구들에게 안부 인사 돌리랴, 혹시 오늘의 눈으로 인해 비행기 시간이 변경되지는 않았을지 확인 하랴 정신 없었다.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던 친구들은 다행이 별로 지루해하지 않았던 같다. 공항은 지루할 없는 장소다. 떠나는 사람이 있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방금 택을 뜯은 같은 빨간 트렁크를 끌고 가는 여자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 유럽이겠지. 트렁크가 걸로 봐서 출장은 아닌 같아. 출국하는 하이힐을 신고 비행기에 오를 정도라면 비행기에는 익숙하거나 아주 처음이라는 얘기인데. 아마 여자는 실연하고 나서 홧김에 여행을 떠나는 지도 몰라. 아마 나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칙칙한 등산화를 신고 엄마 옷장에서 꺼낸 것 같은 산악 잠바를 뒤집어 쓰고 시종일관 헤벌쭉 거리는 여자애는 뭐지. 뒤에 가방은 무게를 분산시키지 못하는 보니 싸구려군. 여행은 가고 싶은데 돈은 최대한 아끼려고 보니 장기 여행자인가 보다. 저렇게 헤벌 거리지? 공항이 처음인가? 것이다.

 

이건 오해다. 나는 공항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개월 전인 2009 6월에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가설을 세운 사람의 의견을 완전히 반박할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늦어도 보딩 타임 30 전에 게이트 앞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고 있는 멍청이였으니까. 친구들과 한참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 명이 나에게 물었다.


'
그런데 비행기 시야?'

'? 8 '

'지금 7 인데?'

'괜찮아 30분만 있다가 가지 '

 

이런 젠장. 나는 30 전에 게이트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머릿속에서 게이트 라는 글자는 출국장이라는 글자로 바뀌었을까.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을까.

결국 나는 넓은 인천공항을 발짝도 걷지 못하고 달려야 했다. 출국장에서는
'
저기요.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비행기가 돼서요'
남발하며 출국 스탬프를 받았고, 나를 유혹하는 면세점을 빛의 속도로 지나, 공항 내의 지하철 같은 타고 게이트로 움직였다. 아니 순서가 뒤바뀌었나?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하철에 타고 있는데 항공사에서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내가 했던 마지막 통화는
'
민동미씨 어디십니까'
'
지하철 같은거 타고 움직이고 있어요'
'
그럼 알겠습니다'
30 짜리 통화였다. 알겠다고? 알겠다는 거지? 설마 나를 놓고 가려는 아니겠지? 아니면 내가 올지 올지를 가지고 승무원끼리 내기라도 걸까? 그렇다면 내가 무사히 비행기를 탄다는 쪽에 사람들은 이기는 걸까 지는 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정갈한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민동미씨! 하고 이름을 불렀다. '!!!!!!!' 라고 대답하면서 다시 질주. 이번에는 승무원 언니와 함께. 승무원 언니는 나보다 걸음 앞에서 뛰었는데 뒷모습을 보면서 같이 뛰니까 빨리 있을 같았다. 하지만 어디 마음과 몸이 같을까. 마음이야 우샤인 볼트지만 점점 무릎도 아파오고 엉덩이는 내려간다. 무빙워크니까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되겠지. 하고 요령을 피우고 있는데 이런 나를 눈치채고 하시는 말씀. '뛰셔야 되요!' 

 

그래요 저는 뛰어야 하는 거죠. 50만원이나 주고 티켓인 데다가 여행 첫날 부터 이걸 놓치면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같거든요. 정말로 미친듯이 뛰었다. 승무원 언니 등만 보고 뛰어서 난 내가 몇 번 게이트로 가야 했는지도 몰랐다.

드디어 도착한 게이트. 티켓을 주고 좌석을 찾아 들어가니 모든 승무원들이 나를 보면서 안도의 미소를 같았다. 아니면 그냥 지각쟁이 승객을 바라보는 한심한 눈빛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나는 비행기를 탔다.

친구들과
수다 대가로 계속 뛰었더니 어느 배가 고팠다. 보라색 타이 항공 담요를 덮고 나는 그냥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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