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30 - [여행/태국] - 워크캠프에서 만난 사람들

사람 중심의 후기에 이어 이번에는 사전 중심의 후기를 써 보았다. 원래는 동아리 회지에 넣을 내용이지만 저작권자는 나니까 여기저기에 넣어도 돼겠지. 후후

개인적으로, 감상문 쓰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독후감을 쓰지 않으면 까먹는 것 처럼.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돼새김질 하는 과정은 정말로 중요하다.

자, 그럼 스타트~



워크캠프에 참가한다면 가장 걱정되는게 뭘까? 언어, 음식, 돈? 모두 다 해당이 되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곳에서 내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것이었다. 한 학기를 쉬고 인턴을 하던 중에 지루한 회사 생활을 탈피하려고 찾았던 탈출구가 바로 워크캠프였으니, 회사생활보다 더 재밌기를 기대한 것은 물론이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지 굉장히 궁금했다. 흔히들 여행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나. 나 역시 익숙한 장소 이외의 곳에서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발견하기를 희망했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의 내 모습을

 

위에 보이는 표는 우리팀의 리더인 Thor가 첫날 우리에게 그려준 스케쥴 표이다. 위에 쓰여진 모든 일정들을 우리는 소화했고, 심지어 비가 온다 하더라도 완수했다. 워크캠프마다 현지인 리더를 한명씩 정해서 그가 우리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끈다. 따라서 리더의 역량이 워크캠프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데, 우리팀의 리더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사람중에 가장 리더답고 남자다운 사람이었다. 침착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무엇보다 배려심이 있었고, 복작한 상황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아, 아깝다. 태국사람이 아니고 한국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잘 나온 사진이라 계속 우려 먹는다 ㅋ 왼쪽부터 thor, 나, 특별 출현한 건희오빠>

잠깐 Thor에 대한 그리움으로 얘기가 샜지만, 활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정말로'저 위에 쓰여 있는 모든 활동을 했고, 너무나 정직하게 완수했기 때문에 활동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나는 그저 내가 그 곳에서 얼마나 어리버리 했고 찌질했는지를 들려주고 싶을 뿐. 자, 이제부터 2009년 8월 약 2주간 민동미라는 사람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태국 산골짜기에서 벌였던 일들이다.

 

처음엔 좋았지

워크캠프는 다국적 캠프로서 마치 007처럼, 지정된 장소와 시간에 신청한 인원이 모이면 그때부터 캠프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영어 실력을 걱정했지만 13명 중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를 포함하여 3명이나 되었고(그 중에 한 명은 불어와 영어까지 3개 국어에 능통했다) 애들이 다 눈치 100단인지라 희한하게도 내가 하는 말은 대충 알아 듣더라. 때문에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름 서울에서만 태어나고 자란 도시녀 인지라 어쩌다 선명하게 보이는 보름달에도 감탄하는 나는, 자연에 순응하며, 조금은 불편하지만 자급자족하며 순박하게 사는 시골의 삶이 재미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었)다.

 

원시로 회귀하다

    나는 잊고 있었다. 이곳은 태국이라는 것을. 나는 또 잊고 있었다. 이곳은 편의 시설이 전혀 없는 깡시골이라는 것을. 멋쟁이 Thor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준 숙소에는 샤워기가 있는 샤워실이 있고, 엉성하지만 화장실이 구분 되어 있고, 부엌이 마련되어 있지만 그래도 시골은 시골이다. 몸뚱아리만 멀쩡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얼마나 허술하게 준비했는지 하루도 안 가서 깨닫게 되었다. 산 속에서 꼭 필요한 긴 팔과 긴 바지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가지고 있던 반팔은 한 벌 뿐이었던 나는 앞으로 2주간 매일 같은 옷만 입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없는 게 왜 이리 많은지, 생각해보니 워크캠프 오기 전에 방콕에서 돌아다닐 때도 더운 날씨 때문에 다소 헐벗은 채로 있었던 터라, 나에게 긴 옷이나 운동화가 필요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산을 돌아다니는데 적당한 운동화도 없었고, 있는 거라고는 썬크림이랑 침낭 정도? 적당한 장비가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밤마다 모기한테 수혈'당하고, 물집투성이인 맨발로 밭을 돌아다니면서 깨달았다. 원시인이 따로 없구나.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

    시골은 어느 나라나 다 똑같다. 그날 먹을 것들을 밭에서 길어오고 주된 식수원은 우물이며 경조사가 있는 날에는 애완동물처럼 기르던 돼지나 개를 잡아 먹는다. 캠프 생활을 하면서, 한 사람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면 참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30분 산길을 걸어가 물을 뜨고 1시간 거리에 있는 정글에 가서 대나무를 잘라 식기와 컵을 만든다. 물론 우리는 외국인이고 초짜기 때문에 항상 마을 사람들이 몇 명 붙어서 우리를 도와 주었다. 설명을 듣기로는 품앗이처럼, 마을 어른들이 돌아가면서 일을 도와 주는 것 같던데 게으른 외국인 13명을 먹여 살리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일의 양은 정해져 있으니 하루가 가기 전에 완수해야 했지만, 13명이 공평하게 배분해서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학교 조모임처럼 항상 하는 사람만 하고, 하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안 했다. 특히나 우리 팀에는 고등학교 동창인 프랑스 아이들 4명이 있었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기념여행으로 워크캠프를 온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놀러 왔다는 거지.

    결국 사건이 하나 터졌다. 마을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쓰레기 줍기 시범을 보이는 활동을 할 때에 프랑스 여자애 둘이 쓰레기는 안 줍고 담당한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도중에 이탈을 한 것이다. 결국 찾아내고 보니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소꿉놀이를 하고 있더라. 숙소에서 챙겨 왔는지 디카까지 들고서. 찾아 다니던 사람들 모두 당황했지만, 그녀들의 천진난만한 미소 앞에 그냥 해프닝으로 묻어 두기로 했다. 으이그.     

 

 

 

안녕 얘들아 이리 오….

    태국은 생각보다 큰 나라다. 어느 정도냐면, 북부와 남부 사람들의 생김새가 약간 다른데, 북부는 얼굴이 동그랗고 코가 뭉툭한 반면에 남부는 얼굴이 길고 코가 뾰족해서 마치 아랍권 사람 같은 인상을 풍긴다. 어느 지역이든 간에 아이들은 다 예쁘지만, 북부 아이들의 동글동글한 인상이 참 인상 깊었다. 크고 까만 눈동자와 갈색 피부도 굉장히 건강해 보였달까. 따라서 우리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학교에 가는 첫날에는 아이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에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해 갔다. 가르칠 노래도 연습하고, 알파벳 카드도 만들고 태국어도 배우면서. 하지만 학교에 도착한지 10분만에 깨달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뭔가를 배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어/나는 단지 너를 안아주었을 뿐인데/어느새 내 주변에는 십 여명의 아이들이 몰려와서 나에게 팔을 벌리고 있었어/그 까만 눈동자를 빛내면서//나는 너희를 다 안아주고 싶었지만/내 팔뚝에는 근육보다는 지방이 많아서/어쩔 수 없었어//결국 쓰러진 내 어깨 위에 너희들이 올라 왔을 때/나는 깨달았어/재앙의 시작이구나

    도대체 어떻게 그때의 감정을 표현해야 할 지 몰라서'시'를 한편 지어봤다. 결론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간 모든 것들은 완전히 무용지물이었다. 아이들은 신기한 외국인들을'만지고'싶어했고'친해지고'싶어 했으니, 그들이 그렇게 몸으로 부딪혀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생각나더라.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기란 굉장히 힘들었다. 게다가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고, 행여나 누구 하나 다칠까 봐 신경 쓰는 동시에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새삼스레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위대해 보였다. 교대 가라는 엄마 말 안 듣길 잘 했다는 생각도.

 

<CHIANG RAI의 white temple에서 본 금연 불상, 폭포! 자세히 보면 수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야시장은 밤에도 밝다>

읍내 나들이

    첫 주는 정말 정신 없이 지나간다. 숙소에 적응 할 만 하니 바로 금요일이었고, 주말에는 우리끼리 시내에 나가서 놀 수 있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원래 워크캠프 리더는 주말까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가 불안했는지 아니면 너무 간곡하게 청해서인지는 몰라도 멋쟁이 Thor 오라버니는 주말에도 친히 우리를 가이드 해 주셨다. 가까운 읍내인'치앙라이'에 가서 완전 새하얀 절도 보고 20층짜리 아파트만한 폭포 밑에서 수영도 하고(기분 최고였다. 홀딱 벗고 수영하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비까지 와서 환상적인 분위기 그 자체였으니!) 코끼리도 보면서 관광객 행세를 하던 토요일. 그 지역의 명물이라는 야시장에 가서 주말 하루를 마무리하고 그 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커다란 야시장에서 내가 사라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물론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사라진 거고,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국제전화가 가능한 전화기를 찾아 다닌 거지만, 어쨌든 친구들이 밥을 먹고 있는 도중에 빨리 전화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잠깐 뜬 것이 소동의 원인이 되었다. 나를 찾기 위해 그 많은 인원이 야시장 전체에 방송을 하고 몇 바퀴를 돌면서 찾아 다녔다(고 한다). 납치 당한 줄 알았다니 얼마나 놀랐을까. 한참을 고생했을 그들 앞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에게 이스라엘 친구 하나는 나를 보자마자 끌어 안으면서 말하더라."Dongmi!"아, 그렇게 감격적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야생 버라이어티 정글에서 1박 2일

    대나무를 베면서 생각했다. 잘못하다간 내가 베이겠구나. 우리 활동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정글 1박 2일은 내가 얼마나 육체 노동에 부적합한 인간인지를 알려주는 엄청난 계기였다. 항상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던 Thor가 실수를 했다면, 나를 포함한 우리 팀원들의 체력을 너무 과대평가 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 걸음으로 1시간 반정도 걸리는 정글까지 거의 3시간 가까이 걸려서 도착 했으며, 13명의 팀원에게 세 끼를 먹일 음식을 밭에서 조달하기까지는 또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일을 한다기 보다는 관광을 하는 기분이 강했던 나는 처음 보는 식물, 풍경에도 쉽게 감동해서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게다가 우연히 발견한 폭포에서 수영한다고 난리를 치기까지 했으니, 서울 촌년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사냥용 총으로 새도 잡는 등 진짜 야생을 체험 하다 보니 어느새 13명이 먹을 음식과 잠자리는 마련할 수 있었다. 모닥불 근처에 앉아서 대나무 밥과 민물고기 탕을 먹으면서 하루를 정리하던 중에 모두들 갑자기 이제 곧 워크캠프가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매일 다른 일을 했기 때문에 정신 없이 지나가기만 한 것 같았는데, 어느 새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밤이 아쉬웠는지. 모두들 나름의 방식으로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오밤중에 부모님 줄 선물이라며 대나무 젓가락을 만들고 있는 사람, 몰래 담가 온 술을 먹는 사람, 자기 나라 노래라며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태국 아주머니와 얘기 하고 있는 사람, 진짜 마지막 날은 아니었지만 나는 왜인지 이 날이 우리가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날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놀러 와서 축제를 벌이는 바람에 이것 저것 정리할 겨를이 없었으니깐. 마치 중·고등 학교 때 수련회에 온 마지막 날처럼 시간이 가는 게 너무 아쉬워서 잠도 아까웠던 밤이었다. 알 수 없는 새소리를 BGM으로 깔고서 그 동안 서운했던 일, 좋았던 일을 얘기하면서 정글에서 밤을 지새운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덕분에 다음 날 숙취로 쓰러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사,사…..좋아합니다

    미국 드라마 LOST를 아시는지? 거기에는 숫기 없고 말도 잘 안 통하는 한국인 부부가 나온다. 워크캠프에 가기 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드라마가 생각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백인들과 그렇게 가까이 지냈던 적이 없었다. 외국인이니까. 그런데 태국에서는 나도 외국인이더라. 그 친구들도 외국인이고 나도 외국인인데 서로 같은 처지인지라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도 우스웠고, 처음에는 낯설고 신기하게만 보였던 그들의 생활 방식이나 용모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어느새 정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랑 더 가까워 지고 싶다,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자로서, 리더로서 완벽한 자질을 보여 주었던 Thor, 나보다 5살이나 많았지만 항상 겸손했고 성실했던 건희 오빠, 늘씬한 스페인 미녀로, 아이들과 가장 잘 어울렸던 상냥한 Sara, 힘든 일 가장 먼저 했던 Rinel, 항상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던 애교쟁이 John. 등, 그렇게 밉상이던 프랑스 여자애들도 마지막에 프랜치 키스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 했었다.

얘가 한국인이면 좋았을 껄, 그러면 자주는 아니더라도 드물게 만나면서 같이 놀고, 지금은 마음대로 하지도 못했던 말을 하면서 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텐데.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면 좋았을 껄, 그러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더 알아갈 수 있을 텐데. 어찌나 아쉬움이 많이 남던지 2주 밖에 안 되는 기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이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DANCE LIKE NO ONE WATCH

이스라엘 친구의 라이터에 쓰여 있던 글귀. 외국에 가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면 온전히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얻은 건 그런 식의 자유가 아니었다. 사회적 배경, 나이,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2주 동안, 나 라는 사람 자체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다시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랄까. 내가 바라본 내 모습은 처음에 말했듯이 찌질했다. 생각보다 체력이 형편 없고, 끈기도 없었고, 귀찮아 하고,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보았다. 짜증이 나는 순간에 참지 못하고 전부 드러내어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손재주가 좋지 않아 지붕 만들 때에도 버벅 거렸고, 힘이 센 것도 아니라서 대나무를 짊어질 때에는 균형을 쉽게 잃었다.

마음에 드는 모습 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미워하기 보다는 인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이 때 만난 나를 잘 보살펴 주어야겠다. 찌질하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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