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질 것 같아, 난 나른해 져

 

 루시가 지킬의 집에서 치료를 받을 때 부르던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노래를 듣고 나서 루시가 나오는 부분은 집중해서 보았더랬지, 루시에 대한 하악거림으로 몰래 녹음까지 했으나 소심해서 결국 두개밖에 제대로 못했...ㅠ 관심있는 사람은 첨부파일을 열어 보셔요~

 

 지킬 앤 하이드는 숟하게 얘기만 들어오고 막상 한번도 본 적 없는, 마치 모두가 제목과 주제만 알고 읽어본 사람 없는 '국부론'과 같은 존재였다. 그냥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구도만 알고서 객석으로 들어갔는데, 스토리에 대한 기대 보다는 춤과 노래에 대한 기대가 더 컸으니 초반부에 지킬이 선과 악을 분리해서 악을 가둬 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는 '그래, 이렇게 무난하게 이야기가 흘러 가겠구나~'하는 마음 뿐이었다.

 더군다나 초반부에 여배우들은 그냥 지킬의 선과 악에 대한 상징적인 역할만 할 뿐, 자기 주장을 내보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지킬 혼자서 스토리를 끌어가는 무난한 뮤지컬이겠거니...하고 긴장 풀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번쩍번쩍하는 효과음도 좋았고, 지킬이 하이드로 처음 변신(?)할 때 보인 양 옆의 그림자는 조명연출의 기교+_+까지 보여줬으니 돈 아깝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지.

 

그런데 이게 왠일

 

루시랑 하이드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부분부터 뭔가 달라보이기 시작하는거다.

하이드가 루시를 또다른 자신이라고 생각하는건 이해가 가는데 루시는 왜 하이드를 또다른 자신이라고 생각을 할까.

이 의문이 머릿속에 생기면서부터 루시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시에 대한 연민

 루시는 맨 처음 등장할 때에 거울을 보며 자신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지가 뭐라도 되는줄 알'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그녀가 지금 생활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걸 계속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였는데 아마도 화류계에 몸을 담기 전의 자신의 모습이겠지,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지지리 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둘 것이지 기억하고 고이 모셔둬봤자 점점 더 자신이랑 멀어질 뿐인걸.

 창부의 순정이야 말로 가장 오염되기 쉬운 것이 아닌가. 역시나 예상대로 지킬의 신사다운 모습에 반해서 나른해지는 부분에서는 그저 '쉬운 여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랑루즈의 니콜 키드먼이 살짝 오버랩되기도 했었지.

  창부의 사랑이 귀족집안의 영양과 약혼까지 한 의사에게 얼마나 전해질까? '너도 언젠가는 지킬에게 버림받을꺼야'라는 생각으로 그저 루시의 순정이 짖밟힐 순간을 조마조마하며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킬이면서 지킬이 아닌 하이드라는 존재가 나타나면서 루시는 지킬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간진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고? 루시에게 지킬은 절절한 짝사랑의 상대이면 심지어 그녀의 새 출발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친구인 반면, 하이드는 그녀의 마조히즘 성향(난 루시가 하이드에게 거의 겁탈당하면서도 흥분하는 모습에서 그녀에게 마조히즘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을 일깨워주는 사디즘 성향을 가진, 말하자면 루시의 어두운 면과 부합하는 또 다른 단짝인 것이다.

 그녀는 성공했다. 죽는 순간까지 지킬과 하이드가 동일인물인 것을 몰랐으니 그녀를 죽인 것은 그저 미치광이 살인마일 뿐이고, 전하지도 않았던 사랑은 세상의 모든 짝사랑이 그렇듯이 그녀 안에 남아 있겠지. 결국에 죽기는 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지켜졌다.

 지킬과 하이드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아픔과, 몸에 칼이 찔리는 아픔 중에 어떤 것이 더 아플까?

 답은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루시가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엠마에 대한 공감

 루시가 지킬과 하이드가 동인인물인걸 모르고 죽은 반면에 엠마는 그걸 알고야 말았다. 그것도 결혼식날

'당신의 모든것을 받아주겠'다던 엠마는 애인이 괴물로 변한 순간에도 그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다. 반면에 '나의 모든것을 받아달라'던 지킬은 엠마가 자신을 받아주는 여부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불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고 만다. 내가 왜 엠마에게 감정이입이 됐는지는 몰라도, 애인이, 자신의 나쁜 모습까지 다 받아달라 말하고. 나는, 그걸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결국에 그는 자신의 불에 스스로 타버렸다면, 그때의 상실감과 허무함을 어떻게 감당할까.

 그녀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다 받아주고 싶었을 뿐인데, 지킬은 그녀에게 자신을 받아달라 하고서 왜 그리 무책임하게 희망을 버려버렸을까. 그럴 줄 모르고 그런거겠지. 엠마가 자신을 받아주면 스스로도 일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단지 그의 가슴의 불이 너무 컸을 뿐이리라.

 나는 그저 홀로 남은 그녀가 상실감을 잘 견뎌내길 바란다.

 

 지킬에 대한 속터짐

 한마디로 여자 복 터진 놈이라고 할 수 있다.

 엠마같은 여자 하나 얻는 것도 천번 환생해서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인데, 루시같이 끼많고 몸까지 잘 통하는 여인의 마음도 얻었으니 한마디로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복도 모르고 혼자만의 연구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등짝을 한대 후려치고 싶더만.

 그의 연구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다.

 인간의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을 분리해서, 악한모습을 가두면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 말이다.

아니, 사람이 착한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거지, 그 둘중에 착한것만 진짜 자기 모습인가? 집에서 츄리닝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모습이나, 한껏 차려입고 또각또각 걷는 모습이나 다 한사람 모습인데 왜 그 둘을 분리해서 하나만 살려야 한다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인데 그 둘중에 하나를 없애야 한다면 조금 서운할 것 같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거고, 조화를 이루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영계를 밝히는 주교의 경우는 어찌보면 선한 면과 악한 면을 완벽히 분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지킬은 선과 악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여자 복 많고 못난 사람이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다.

 


 

LG아트 센터는 정말로 서비스가 좋았다.

앞사람 때문에 안보인다고 했더니 다른 좌석 표를 가져와서 바꾸어주는 서비스는 다른 곳에서는 기대하지 못하겠지.

불편해도 좋으니 그냥 서서 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저희는 고객님을 서서 보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자부심이 느껴지더라, 뮤지컬에 나오는 그 어떤 장면보다도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의 원칙이 더 멋졌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