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사라문"은 패션모델로 시작하여 영화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사진작가로써 활동을 하였다. 사진을 찍기 위함이 아니고 현실 그대로를 찍은 사진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촬영 준비는 많이 하였지만 모델들에게 정해진 포즈나 형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를 찍었다.
그러다 보니 초점이 안 맞은 듯한 사진이 주로 많았다. 또 사진을 찍을 때에는 텅스텐 조명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RGB를 따로 따로 색을 입히는 기법으로 인화를 주로 하여 원색을 많이 살리려고 하였다. (실제로 전시된 칼라 사진을 보시면 원색이 두드러지며 전반적으로 청색 계열이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흑백 사진도 보정 아닌 보정을 통해 우연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하였는데 인화시 유리 원판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생긴 자국이나, 필름을 불에 태워 효과를 내는 등이 그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유명 사진가 김중권씨와의 대담에서 '디카를 버려라'라는 말씀을 하기도 했다는군
뻘쭘해 하시는 김중권씨의 표정이 코믹하다.
두 분의 대화 전문을 보실 분은 더보기로,
25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첫 한국전을 시작하는 패션 사진의 거장 사라 문이 한국의 중견 사진가 김중만(55)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사라 문과의 대담은 지난 21일 서울 청담동 김씨의 작업실에서 이뤄졌다. 사라 문처럼 숱한 패션 사진을 찍어온 김중만씨는 스물세살 무명 시절인 1977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사라의 작업실을 방문해 포트폴리오를 보여주었고 이미 유명 작가였던 사라는 거기에 코멘트를 해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33년 만에 회포를 푼 다음 대담을 진행했다.
당신은 사진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난 사진수정 안해요…감동은 기계가 만들지 못해
김중만(이하 김) 당신의 삶에서 사진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라 문(이하 사라) 일반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나는 좀 특별한 경우라서….
김 예, 프랑스 톱 모델이셨죠.
사라 톱 모델은 아니었어요, 톱이 되기엔 좀 어렸고 그냥 모델 일을 했죠.
김 당신이 유명한 모델이었고 이후에 사진작가가 됐으며 카샤렐(프랑스 유명 의상 브랜드)의 사진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사진이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생각합니다.
사라 카샤렐은 옛날 얘기죠. 사실 주문 때문에 사진을 시작했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패션계 주문을 받아 사진 작업을 해도 당시 스타일과는 다른, 좀더 틀에 박히지 않고 풍부하게 표현하려는 저만의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유명해졌고, 또 주문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김 일본 디자이너 미야케 잇세이와도 같이 일하셨는데 그의 작업을 좋아했나요?
사라 예, 그의 작업을 좋아했고 그 사람도 좋아했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죠. 여성의 의상을 새롭게 표현했고 또 독특한 형태를 선보여 패션계에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죠.
김 혹시 한국 의상에는 관심이 없으셨나요?
사라 한국 옷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파리 어느 의상실에서 정말 아름다운 옷을 본 기억은 있어요. 옷의 질감이 특별했는데 그게 어떤 천인지 궁금했어요. 여기서 한번 보고 싶네요. 아마 이곳에만 있는 전통적인 옷감이겠죠. 일본의 면과는 다른 건가요?
김 일본과는 좀 다를 거예요. 미야케 잇세이는 면을 주로 사용하지만 우리는 명주실로 짠 옷감으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면보다 얇고 가벼워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 왼쪽부터 사진가 김중만, 패션사진가 사라 문.
김 자신을 사진작가나 예술가 중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라 글쎄, 예술가라고 할까요. 늘 뭔가를 갖고 작업을 하니까 엄밀한 의미에선 장인이라고도 할 수 있죠. 물론 장인도 예술가니까 결국 사진작가는 장인이자 예술가인 셈이죠.
김 당신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사용하는데 혹시 수정 작업을 하는가요?
사라 수정은 전혀 없습니다. 폴라로이드는 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결점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매력입니다. 지금은 네거티브에 결함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지만 전에는 종종 사진을 찍은 뒤 바로 현상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뽑기도 하고 그러다 사건이 생기기도 했죠. 아니면 사진의 흑백 톤을 보존하려고 살짝 돌려서 뽑기도 했구요. 그러니까 수정은 있을 수 없어요.
김 말하자면 우연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사라 행복한 우연이죠.
김 디지털카메라와 영화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라 영화에 비디오를 많이 사용합니다. 제 영화는 사진과 비디오의 합성이기 때문이죠. 사진과 필름, 비디오를 합성하는 몽타주 작업은 컴퓨터로 할 수밖에 없구요. 여러 가지 기본 작업을 통해 넣고 빼고 하는 몽타주 작업을 해요. 디지털카메라와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김 남편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나요?
사라 전에 같이 했는데 이젠 안 해요. 전시될 작품 중에 ‘서커스’라는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 작업은 과거에 많이 했어요. 현재 선보이는 사진이 합성된 단편영화는 5편입니다.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할 때 불편한 점이라면 바로 작업하는 과정이죠. 특별한 주문도 필요 없고 신비감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컴퓨터 작업으로 대본을 넣을 때도 별로 작업할 게 없죠. 하지만 일반 카메라는 아무리 대본이 훌륭하다 해도 찍다 보면 예기치 않은 사건도 생기고 부족한 기술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요즘 디지털카메라는 너무 완벽한 것이 흠이죠. 자기만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디지털카메라를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김 감동이 있는 작업을 위해서 말이죠.
사라 단순히 보이는 형태만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어떤 형태든 감동과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기계가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죠.
김 지금 사진작가 외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라 주제가 없는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할까요. 물론 아주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김 흥미로운 얘기네요. 예를 들면 꿈이나 사랑이나 뭐 그런 것 입니까?
사라 꼭 사랑이라고도 할 수 없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것이 무엇이 될지. 다만 나한테 내재된 무언가를 일깨우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김 한국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사라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실 한국은 잘 모르는 나라였는데 이제 알게 되네요. 지금은 참 기분 좋고 편안한 느낌입니다. 부디 작품에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그러니까 보정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힘을 가했다는 말씀이 되겠다
어렵다 ㅠ
조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술가의 자존심이고 의도적으로 손을 댄 것은 원본을 더 잘 살리기 위한 첨가제일 뿐이었다는 건가
예술가의 생각은 알 수가 없구나;
덕분에 그녀의 사진은 모니터에서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색을 내뿜는다. (모니터 해상도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기+_+)
예를 들면,
위의 사진은 나를 가장 사로잡았던 사진인데,
흑백 사진이 달라봤자 얼마나 다를까
싶다가도 직접 본다면 그 생각이 달라진다
이 사진을 보고나서 '뇌쇄적이다'는 생각을 했다는건, 나만의 생각일까
굉장히 섹시한 사진이 많았다.
그 자극적인 색감 뿐만 아니라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 나를 숨막히게 하는 사진들이 즐비했으니
내가 그 속에서 흥분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았지
워낙에 여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녀가 표현하는 여성성은 특별했다
물고기같은 날것이랄까.
촉촉하게 젖어 있다는 느낌이 사진을 통해서 느껴졌다
어떤 사진이 그렇게 고고하고 여성스러운 여인을 표현 할 수 있을까.
또한 이 때문에 그녀가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을 지도
그녀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건, 세계적인 명품 달력이라는 피렐리 달력의 1972년 작업을 맡으면서 부터다
솔직히, 달력이 무슨 명품이 있겠어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만한 사진이 있는 달력이라면 명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작업을 하던 해의 주제는 '여성'이었는데, 여성이라는 주제를 여성 사진가에게 맡긴다는 유치한 발상은 누구한테서 나온건지.
원래 여자가 생각하는 여성성이라는게 더 추상적이고, 게다가 주 독자층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려면
여성이 생각하는 여성성+남성이 생각하는 여성성
의 균형을 이루어야만 했다
따라서 동성의 매력의 이성에게 이끌어내라는 피렐리의 요구는 그녀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겠지
다행히도 그녀가 표현한 여성성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충분히 아름다웠고 관능적이었다
내가 그녀의 사진에서 느낀 흥분이 헛깨비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 해에 히트를 친건 말할 것도 없겠지
예술의전당 ‘사라 문 사진전’ ‘누드+섹시’ 넘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작품 선봬 ‘톱모델+작가에 한정판’ 피렐리 명성 업그레이드
1972년 4월 달력에 실린 사라 문의 사진. 피렐리
피렐리 달력은 세계 5위(매출액 기준)의 타이어 업체인 피렐리(Pirelli)가 1964년 처음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 세계의 선별된 VIP 고객과 관계자, 유명인사들에게만 한정 배포하고 있다. 연간 3만 부 가량을 제작해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권엔 약 500부만 지원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어회사인데 타이어보다 더 유명할 정도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수집가들에게도 인기있는 품목으로 떠오른 피렐리 달력은 세계 최고의 명품 달력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피렐리타이어보다 피렐리 달력이 더 유명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 지난 40여 년간 피렐리 달력에 등장한 모델은 모두 당대 최고의 모델이나 배우. 제니퍼 로페즈, 시에나 밀러, 나오미 캠벨, 지젤 번천, 케이트 모스, 신디 크로포드, 밀라 요보비치, 소피아 로렌, 페넬로페 크루즈, 힐러리 스웽크, 브리트니 머피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하다. 피렐리 달력 제작에 참가한 사진가들의 면면은 모델의 명성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최고의 패션·상업사진가만이 피렐리 달력을 위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70년 2월 달력. 피렐리
1970년 9월 달력. 피렐리
첫해인 1964년 달력은 비틀즈가 가장 좋아했던 사진가였으며 비틀즈의 앨범사진 촬영을 담당했던 로버트 프리드먼이 맡았고 2009년 달력은 아프리카 사진으로 유명한 피터 비어드가 맡았다. 그 사이의 주요작가를 보면 이네즈 반 람즈워드, 버트 스턴, 애니 레보비츠, 리처드 아베돈 등으로 사진가 자체가 스타급이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2010년 달력은 테리 리처드슨이 작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패션모델에서 사진가와 영화감독으로 변신
1972년 12월 달력에 실린 사라 문의 사진. 피렐리
1972년 6월 달력에 실린 사라 문의 사진. 피렐리
자동차 타이어 브랜드인 피렐리 달력의 내용은 주고객층인 남성들을 겨냥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테마로 제작했으며 예술적인 누드를 포함해 섹시한 사진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72년은 획기적인 변화의 해였다. 그때까지 피렐리 달력이 쌓아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특별한 사진들을 창조해내야 하는 문제는 늘 골칫거리였다. 달력제작 총책임자인 예술감독 데렉 포사이스는 거리마다 넘쳐나는 저속한 이미지와 포르노 같은 사진들로부터 피렐리 달력만의 차별성을 두고 싶어했다. 대중들도 벗은 몸을 클로즈업한 사진에서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뭔가 새로우면서도 순수하게 여성적인 것을 원했다.
그래서 내린 모험적인 결단이 남성사진가들이 찍던 관행을 깨고 최초로 여성사진가 사라 문에게 피렐리 달력을 맡긴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인상파 사진가로 알려진 사라 문은 입자가 거친 35밀리 카메라로 부드러운 확산광과 환상적인 배경을 즐겨 사용하고 있었다. 문은 인생경력을 카메라 렌즈의 반대쪽에서 시작한 인물. 그녀는 패션모델이었다. 그러나 모델 일에 지쳐있던 문은 어느샌가 사진가와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그녀 스스로는 사진과 회화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지만 문의 사진은 그림 같은 느낌이 강하게 나는 스타일이었다.
1997년 달력-작가 리처드 아베돈. 피렐리
2000년 달력-작가 애니 레보비츠. 피렐리
낱장 1장씩 떼내 액자 넣어 고가에 파는 얌체꾼도
사진촬영 장소로 정해진 파리는 사라 문이 열렬하게 사랑하는 도시. 파리의 빌라 레 티이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게쉬타포의 본부가 있었으며 그 후 버려져 황량하게 된 곳이었다. 이곳을 촬영지로 이용하기 위해선 대대적인 손질이 필요했는데 모든 일을 문이 직접 했다. 그 결과 촬영장은 지구상의 땅이 아닌 환상적인 분위기가 났다. 1972년의 테마는 ‘여성’이었는데 에로틱한 메시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여성성을 담아야 했다.
사라 문은 모델을 직접 선택했다. 믹 린드버그, 수잔 몬커, 보니 파이퍼, 잉거 해머 등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담한 몸집이었으며 풍만한 관능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라는 그 모델들과 어울려 끈기 있고 세심하게 배려해가며 작업했다. 덕분에 사진가와 모델 사이에 서로 우정을 키우면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고 아름답지만 결코 섹시할 필요가 없는 진정한 이미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 바람에 일부 남성들로부터 “달력이 레즈비언 취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언론은 문이 제작한 달력을 좋아했고 1972년 판은 대성공이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사라 문이 촬영한 사진이 실린 달력 낱장을 한 장씩 액자에 넣어 1백 파운드씩 받고 거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