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말씀으론, 이번 학기에 보는 영화중에 가장 재미있을 것이라는데
아, 그럼 나머지 영화들은 다 재미 없다는 말인가 ㅠ

영화의 배우들은 모두 무명이거나 신인 배우들을 기용하였다
네오 리얼리즘의 표현 방식 중의 하나라는데, 원래는 유명한 남자배우를 쓰는 대신 제작비를 지원해주겠다는 러브콜을 받았더랬다. 하지만 감독이 거절한 뒤 이렇게 무명배우+허접한 특수효과(소나기, 운전장면)를 적절히 사용한 멋진 영화가 탄생 한 것이다. 
내가 감독이었대도 유명 배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똥파리를 원빈이 찍었다면 뭔가 이상하잖아

유달리 내가 바보 같은 날이 있다. 밤새서 준비한 발표를 떨려서 제대로 하지 못 한 날이라던가 가방 문이 열린 줄도 모르고 신촌거리를 배회했던 날이라던가, 아니면 오늘처럼 수업시간에 조느라 중요한 과제를 듣지 못한 날은 심심치 않게 나에게 찾아온다. 이런 날이 드물지 않듯이 나의 바보 같은 행동과 부주의함에 화가 나서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일도 지지리도 못하면서 성격까지 나쁘냐는 평을 듣기 딱 좋은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다. 화나는 나를 다스리기에 나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므로.

  분명히 나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데 너무나 쉽게 화로 연결되는 이유는 뭘까
. 답은 단순하다. 20여 년 밖에 살지 못한 나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체면이라고 하면 비가 와도 절대로 뛰지 않는 꼬장꼬장함을 떠올리는데, 체면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기의 입장이나 지위로 보아 지켜야 한다고 생각되는 위신이다. 때문에 체면 차리기는 절대 무너지면 안 되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행위이고, 이 영역이 무너졌을 때 당사자는 창피함과 때로는 모욕을 느끼기도 한다. 이 정의를 위의 경우에 적용한다면 한마디로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남들 앞에서 부끄러워 지지 않기 위한 체면 차리기인 것이다. 무엇이 부끄러운지는 세대와 가치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지만, 옛날 어르신들이 비가와도 뛰지 않았던 것은 뛰는 것이 지위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행동이기 때문이고, 위에서 나열한 바보 같은 행동에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 지위에 맞지 않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 이다. 둘 다 체면 차리기로 이해할 수 있는데, 위의 정의에 비추어 보면 나이와 시대에 상관없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체면 차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감춰서 체면을 차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부끄러움은 다분히 자의적인 감정이라 당사자가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감춰지기 쉬우므로 무덤덤한 척 함으로써 체면을 차리는 방법이 자주 쓰인다. 아빠[1](영화의 주인공이며 자전거를 잃어버린 당사자) 또한 무덤 덤 한 척 함으로써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한다. 자전거는 분명히 찾아야만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다. 자전거를 잃어버린 다음 친구와 함께 시장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눈짐작으로만 자전거를 찾는 장면은 그가 실상 자전거 찾기를 귀찮아 하는 것인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용의자를 윽박지르는 장면에는 이전과는 다른 적극성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모순된 마음 - 자전거를 찾되 자전거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하 - 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너무 열심히 찾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되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는 모순된 생각 때문에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자전거는 대충 찾고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에게는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체면 차리기는 쉽지 않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에야 답답하고 화나는 마음을 감쪽같이 숨기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야 가장으로서의 위신이 서는데, 자전거는 나타나지 않아 속은 타고, 때문에 애꿎은 사람만 닦달하는 그 모습은 남의 일 같지 않아 더욱 안쓰럽다. 여기서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성인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혼자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자전거를 잃어버린 것과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 자전거를 잃어버린 것은 물론 다를 것이다. 이 경우에 당연히 후자의 상황이 더욱 절박할 것이지만, 감독은 교묘하게 영화의 주인공이 아빠(가장) 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후자의 상황을 부각시킨다.


아들이 아빠를 따라다니는 모습에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다. 어린 아들은 아빠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사실 영화 속에서 아들의 비중은 없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작다. 대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으며 행동 또한 아빠를 따라다니거나 경찰을 불러오는 정도에 그친다. 게다가 자전거를 진지하게 찾는 아빠와는 달리 용의자에게 동정심을 보이거나 시장에서 신기한 물건에 눈길을 뺏기는 등 마치 놀이하듯이 따라다니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생각도 준다. 아들이 아니라 애완동물이었어도 이야기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 것인데, 감독이 굳이 아들을 아빠와 한 팀이 되어 다니도록 한 이유는 무엇 일까?

애완동물이 아니라 아들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아들이 있을 때에만 아빠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같이 다니지 않고 아들이 같이 다녔던 이유는, 그가 아빠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남편과 아빠라는 위치가 주는 책임감 중에 어느 것이 막중한지에 대해 감독은 후자로 결론을 내리고 아들과 팀을 이루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감독은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가장의 절박함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단순히 아들과 팀을 이루도록 한 것만으로도 관객에게 무의식적으로 각인시킨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영화 후반부에 아빠가 자전거를 훔치고 주인에게 잡힌 다음 풀려나는 장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장면은 이전까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던 아들이 최초로 영화의 흐름에 개입한 시기이자 동시에 관객에게 그가 아빠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순간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체면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전거를 찾는 것이 부끄러워 찾는 둥 마는 둥, 하지만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이기에 결국에는 도둑질까지 하게 된 남자. 그는 성인이었고 남자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며 두 아이의 아빠였다. 그가 처한 상황과 심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그가 아빠라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영화가 이렇게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누구나 느꼈을 법한 가장으로서의 중압감과 책임감을 자전거를 찾는 과정을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인 이유는 주인공의 아들이 어리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아빠라는 말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자전거 도둑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 (1948 / 이탈리아)
출연 람베르토 마지오라니, 엔조 스타이오라, 리아넬라 카렐, 지노 살타메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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