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여자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 눈물을 머금어 촉촉해진 눈동자,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 손을 대면 탁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그 위태로움에서 동정과 연민을 느꼈는지 모른다. 우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모 여배우는 자신의 우는 모습을 셀카로 찍어서 미니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물론 그녀의 행동은 가식적인 눈물이라는 이유로 네티즌의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어쨌든, 예뻤다.

 


[그들이 사는 세상]

대부분의 배우들은 비현실적일 만큼 예쁘게 운다. 어쩜 그렇게 콧물 한 방울 안 나오는지, 내가 울 때에는 콧물이 흐르다 못해 가래가 될 정도로 나왔지만 그 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인체의 신비를 보여주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유전자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현실과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을 표현하는 데에는 우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콧물과 가래를 훌쩍거리면서 우는 것 보다는 다소 비현실적이더라도 정갈하게 우는 것이 슬픔을 더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미인의 눈물이 천하를 호령한 예는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업인 그들은 어쩌면 전략적으로 예쁜 울음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보여지는 모습을 의식해야 하는 배우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들 모두가 마음껏 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작가한 시점부터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는 큰 소리로 울지 않기 등의 묵시적인 공공 규범 덕분에 감정이 터져 나오는 그 순간에도 지금이 내가 울어도 되는 상황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웃음과 다르게 울음은 비일상적인 것이고 비일상적인 것을 일상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몇 개의 체를 거쳐서 걸러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울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응축도가 높아 지는 것은 부수적인 현상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울음은 그 분들이 그렇게 하듯이 우리들에게도 단지 슬픔을 표현하는 퍼포먼스가 되어 버렸다.

 

밀양의 신애(전도연)은 참 많이도 운다. 슬퍼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뛰면서 울고, 누워서 울고, 웃으면서 운다. 그 조그맣고 가냘픈 몸이 온 몸을 쥐어 짜내면서 울었을 때에 느낀 전율은 그녀의 처지를 동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녀의 울음은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격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아이를 잃고 타지에서 홀로 사는 여인이 자기 소리는 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의외로 그녀는 눈물을 많이 내보이지 않는다. 울다 지쳐 누워 있는 것도 울음의 연장이며, 울기 전에 가슴이 꼭 죄이는 그 순간도 울음의 연장이다. 슬픔이라고 정의하기도 모호한, 그저 터질듯한 가슴을 막기 위해 취하는 모든 행위들이 전부 울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물이 나오는 순간만을 울음이라고 정의하거나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울음=눈물이거나 울음=슬픔으로 동일시하는 한정적인 정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 있다. 이는 신애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울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표현력을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울음의 정의를 확장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면, 첫째, 우는 순간에 손, , 가슴은 가만히 있는 것일까? 한 지체를 섬기는 사족일진데, 따로 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과 발의 울음을 표현하거나 생각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둘째,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울음이 그친 것일까?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는 않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슬픔의 발자국을 다독여 주는 것이 울음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면 신애가 보이는 이상한 행동들은 전부 다 눈물 방울이다. 이 질문의 답을 신애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결한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대부분 울음으로 표현하듯이. 울음은 많은 의미를 응축하고 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러 종류의 울음을 사용하는데, 언어 능력을 완전히 갖춘 성인들이 울음을 슬픔의 표현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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