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국내도서
저자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ексиевич) / 박은정역
출판 : 문학동네 201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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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문학으로는 가장 영예로울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9885)

과연 이 책이 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되는가를 놓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 책을 단순한 인터뷰 모음집으로 볼 수 있다. 그래, 사람의 말이 흔하고 하찮고 빨리 퍼지는 요즘같은 시대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도 페이스북의 답벼락에는 새로운 소식과 이야기들이 올라 오고, 뉴스는 끊임없이 이슈들을 생산한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지인의 치과 이용기를 손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런 시대에 남의 이야기가 무슨 대단한 가치를 지닌단 말인가.


내가 사는 나라에서 여성과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합쳐지면 쉽게 위안부 문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땅의 여성들은 전쟁에 수동적으로 휩쓸린, 피해를 당한 피해자의 역할로만 쉬이 기억된다. 물론 조금만 더 곰곰히 생각을 해 보면 신라시대 돌과 끓는 기름을 던져 적을 막은 여인들의 이야기나, 바다에 나간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진 길긴 모성이 나오지만 전쟁은 폭력, 그리고 폭력은 남성의 것. 여성은 그 폭력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전쟁이 나면 여자들은 남자들을 보내고 집에서 쓸쓸히 그들을 기다리거나 속절없이 포로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러시아의 붉은 소년단은 15세 미만의 어린 아이들까지 전쟁터로 내 몬 악독한 징집 방식이었다. https://namu.wiki/w/소년병 가까운 나라 북한에서도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가치관의 형성이 덜 된 탓에 세뇌하기 쉽고, 신체적인 능력을 떨어지지만 어린아이라는 특징을 이용해서 온 몸에 슈루탄을 두르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역할을 맞기에 제격이라고 한다. 나는 저 멀리 소말리아의 한 소년병을 마약과 명예를 미끼로 죽음으로 내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내몰린 아이들은 어떻게 커 가는 걸까. 너무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전쟁중에 키가 커 버리고' '여성용이 없어 남성용의 구두를 질질 끌며 전장을 누벼야' 했던 아이들은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 넣는다. 

적이 맹렬한 기세로 총격을 시작했어...얼른 도랑으로 뛰어내렸는데, 외투가 새것이라 더러운 흙탕 바닥에 그대로 누울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아직 안 녹고 쌓여 있는 눈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지. 젊다는 게 그래. 절체 절명의 순간에도 목숨보다 외투를 더 챙기게 돼. 젊은 아가씨는 때론 바보라니까. 

남자들이 승리와 명예를 향해 달려나갈 때 전쟁 한가운데의 소녀는 당장 오늘 입은 깨끗한 외투가 너무 좋았다는 것, 그리고 이 외투가 더러워지는 것이 싫다는 것을 생각한다. 모두가 한 가지만을 향할 때에 자신의 욕망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모습이 얼마나 철없는지. 그리고 그래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랑은 전쟁터에서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개인적인 사건이다.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동의 사건들일 뿐. 죽음까지도

우리는 가시철조망이 쳐진 게토에 살았어. (중략)우연히 창밖을 봤어. 세상에, 우리집 맞은편 벤치에 소년과 소녀가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끔찍한 살육과 총살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아이들이 키스를 하고 있더라니까. 나는 그 평화로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어. (중략) 짧았던 우리 거리 한쪽 끝에서 독일군 순찰병이 나타났어. 그들도 당연히 그 아이들을 봤지. (중략) 소년과 소녀가 잠깐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내 고꾸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어. 둘은 함께 쓰러졌어 (중략) 아이들은 언젠간 게토에서 죽을 운명이란 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다른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거고. 그건 사랑이었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어...사랑밖에. 

잊은 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잊지 않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포로를 때릴 순 없었어요. 어쨌든 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니까. 그렇게 우리는 각자 자기 행동을 결정해야 했고, 그건 중요한 일이었어요. 

우리 포로들이 근교 모처로 압송돼 왔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곳에 자기 일가붙이가 있ㄷ으면 데려가도 된다고. 마을 여자들이 부리나케 거기로 달려갔지! 저녁 때쯤 여자들이 돌아왔는데 누구는 자기 일가붙이를 누구는 낯선 이를 데리고들 왔더라고. 

전쟁이라는,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숫자로만 치환되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서야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길 수 있다. 전쟁이 가져다 주는 수천 수만의 해악 중에 단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그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가치에 사랑이 있다.

모든 명예와 훈장이 다 나눠지고 난 다음에서야 그녀들은 얘기한다. 정말로 무서웠다고, 정말로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또 그녀들은 말한다. 

인생은 사랑과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지.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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