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
국내도서
저자 : 알베르토 모라비아 / 정란기역
출판 : 본북스 201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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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정의 이유를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은 없다. 간혹 내가 만난 몇 명은 감정의 이유를 나열하듯이 설명하기도 한다. 그녀는 정직하다 그녀는 성실하다 그녀는 아름답다 등등..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그 설명들은 감정이 생기고 난 다음에 만든 것이라는 걸. 
감정은 생명처럼, 혹은 마치 병처럼 왜 태어났느냐고 물을 수 없다. 그냥 태어난 것, 그 존재 자체만 있을 뿐이다. 

남자는 궁금하다.

왜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졌는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지. 여자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고, 답답한 마음의 남자는 자신이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나름의 이유를 만든다. 이유가 없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여자가 자신을 경멸하게 된 이유들을 생각해낸다. 사실을 따지고 보니, 남자가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감정에 비해 남자는 그다지 여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본인은 충동적이라고 주장하지만 타이피스트와 잠깐 외도를 하고 그 현장을 아내에게 들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남자가 골똘히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는 중간에 갑자기 나온 것으로 

이렇게 되고 보니 그 일에 대해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 초래했을 현상들에 대해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신한다. 에밀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같았지만 아마 자신도 모르게 깊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 117p

라고 말한다. 

자신의 외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에밀리아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할 정도니, 부부 사이를 짐작할 수 있을 법 하다. 불편할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는 관계. 그러니 남자는 더욱 궁금하다. 대체 나의 무엇이 그녀의 감정을 변하게 했는지. 

간단히 말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에 대한 감정이 좋았단 말이야.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뒤부터 나를 안 좋게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는 거야 - 138p

난 당신을 경멸해. 이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야.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이유야. 난 당신을 경멸해. 당신 몸이 닿을 때마다 언제나 몸서리쳐졌어. 진실을 말했어. 난 당신을 경멸해, 난 당신이 싫어! - 140p

남자는 희안하게도, 에밀리아의 사랑을 되찾는 방법보다는 그녀가 자신을 경멸하게 된 그 이유를 캐내는데에 집착하게 된다. 마치 문제의 답을 찾기라도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결국 문제는 풀리지 않았고, 그녀는 감정만 남긴 채로 그의 곁을 떠난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에밀리아의 환영은 남자의 복잡한 심리를 잘 보여준다. 보트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에밀리아. 책 한 권을 통틀어 그녀의 미소는 딱 한번 보인다. 

누군가에게 경멸처럼 강한 감정을 받게 되는 사람은 왜? 라는 질문부터 하게 되는게 당연하다.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감정이 탄생할 이유는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아주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오랜만에,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율리시스의 줄거리를 이용하여 이 부부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 사는 일은 다 똑같다. 

사실 율리시스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한 사나이였어요. 그의 잠재된 의식은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게 싫어서 앞길에 장애물이 생기길 바랐고, 또 그렇게 된 거죠. 율리시스의 모험 정신은 조금이나마 고향에 늦게 돌아가고 싶은 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아요. 모험을 하다보면 시간이 지체되고, 자연스럽게 귀국이 늦어져 고행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얘기죠.  ...... 오디세이는 부부 사이의 권태와 인간의 내면을 다룬 이야기에 지나지 않아요. - 180 - 181p

(약간 구식이지만 옛날 표지가 더 마음에 든다. 빨강과 초록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사람의 욕망을 보여 주는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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