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영화에 적용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제 13의 아해가 무섭다고 하오 ㅠ


얼마 전에 조쉬 하트넷, 이병헌, 기무라 타쿠야라는, 한 명만 만나도 가슴이 뛰어서 제대로 바라보기 힘든 세 남자가 한 영화에 출연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라는 제목의 영화였는데, 나에게는 멋진 남자들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줄거리에 상관 없이 꼭 봐야 되는 영화였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긴 말은 하지 않겠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과 배우들의 화보 모으기에 여념 없었던 나는 관련 영화잡지를 살펴 보던 중에 인상 깊은 조쉬 하트넷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는 자신 평생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로 페델리코 펠리니의 <8 2분의 1>을 꼽았다. 그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배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 할 영화 100> 39번째 영화이자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232번째 영화인 <8 2분의 1>은 영화사에서 가지는 위치만큼의 값어치를 한 것 같다. ‘했다가 아닌 한 것 같다인 이유는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기여를 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사에 크게 기여한 작품들은 쉽게 알 수 없는 스토리를 가졌거나 감독의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였는데 이 작품은 그 두 가지를 전부 가지고 있으니, 아마 다른 작품들보다 두 배는 중요했으리라. 조쉬 하트넷처럼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더욱이 그러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그저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8 2분의 1>은 긴 고민을 안겨 주었다. 결국 나는 주인공 귀도의 행동을 중심으로 살펴 보려 한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의 모습, 아이 같은 그의 모습. 지금까지 많은 영화에서 보여진 것처럼 그도 철없는 남자 중의 한명인 것일까.

 

플롯 구성상으로는 열린 구조를 가진 <8 2분의 1>은 말 그대로 모든 줄거리가 열린 상태로 되어 있다. 주인공 귀도의 생각과 상상과 현실이 맞물리면서 현실을 상상처럼, 상상을 현실처럼 나타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기 힘들고 또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귀도는 성공한 영화감독이지만 예술을 창작하는 사람이 그렇듯이 다름 작품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차기작은 벌써 제작자와 세트까지 만들어진 상태지만 제일 중요한 배우와 시나리오가 미완성 상태이다.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은 귀도에게서 답을 들으려고 하고, 모든 것을 열러 있는 상태로 두려는 귀도의 행동은 닫혀 있는 상태를 원하는 배우, 제작자들에게 몰매의 대상이 된다. 그 속에서 두려움을 느낀 귀도는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동시에 그곳으로 퇴화한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 모두가 인정하는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 성인이 아니다. ‘북어를 쓴 최승호 시인이 말씀 하였듯이,어린이가 덜 자란 어른인 게 아니라 어른이 자라고 있는 어린이일 뿐이기에 귀도가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지나치게 낸다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중대한 결정은 무조건 미루려고 하고 무서운 상황에는 이성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어린 시절 알고 있던 주문을 외운다. ‘아사 니시 마사는 그 옛날,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기까지 안전하게 보호해주던 주문으로 어린 시절에는 효과를 보았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보물은 그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영화의 모티브 그 이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라기나의 룸바, 포도주 목욕 장면, 수도원의 삶 등은 그의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데에는 유용할 지 모르지만 <8 2분의 1>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는 그 기억 속에 침잠한다. 현실 도피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은 할렘 장면이다. 그곳에는 유년기의 여인인 사라기나, 그에게 최초의 쇼걸인 자클린, 영화에 참여하는 배우, 아내 루이자, 정부 카를라 등 전부 그와 관련된 여자들만 있다. 그 속에서 그는 유년시절 어머니에게 받았던 것처럼 포도주로 목욕을 하고 순결한 하얀 천에 아이처럼 쌓여있다. 과거의 어머니를 대체하는 사람은 현재의 아내인 루이자이지만, 루이자는 오랜 결혼 생활로 인해 그를 다루는 법을 알았을 뿐,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지나간 기억을 끄집어 내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는 그의 시도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마음이 어떤지 처절하게 공감 가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정작 진실은 보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그를 보면서 구제불능의 로맨티스트라는 누군가의 대사가 생각났다.

 

<우리나라에서는 뮤지컬 '나인'으로 공연되었다. 
귀도 역의 황정민이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모습>

그가 영화 속에서 만든 창조물들 모든 배우들 을 그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것을 탓하며 계속 바꾸려고만 한다. 결국 찾아낸 완벽한 창조물인 클라우디아는 그의 영화 속 주인공에게 그녀가 그러하듯 새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이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녀가 (영화 속에)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받고 싶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그의 행동은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사랑을 주지 않는 사람은 받지도 못한다는 법칙. 클라우디아의 말처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 따라서 그가 그토록 원하는 마음의 안정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매력 없는 남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귀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원을 만들어 돌게 한다. 혹자는 이것이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며, 영화의 초반에 보여준 것처럼 답답한 차 안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귀도는 모두가 함께 모여서 화합 할 수 있는 장면에서조차 메가폰을 잡고 명령을 하려 한다. 이는 갑자기 등장하는 관악대로 상징되는데, 관악대를 이끄는 흰 옷을 입은 소년처럼 귀도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창조물을 사랑하고 이끈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가 창조물에게 베푸는 사랑은 그 자신을 위한 사랑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귀도가 서로 소통하는 사랑을 깨닫는 데에는 얼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 희망적인 것은, 이전까지는 그저 맹목적으로 받으려고만 했던 사랑을 자신의 창조물들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그는 그토록 추구하던 완전한 진실을 말하는 길에 한 발짝 들어섰으며 영화의 초반에 보이던 갇혀 있는 모습에서 탈피하였다. 하지만 그는 혼령들이 그에게 말했듯이 자유의 몸이지만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귀도에게 한줌의 박수를 보낸다. 


8과 1/2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1963 / 이탈리아)
출연 아누크 에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구도 알베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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